반클리프 아펠과 발레, 그 사적인 관계
꼭 발레에 국한하지 않더라도 이제 강수진 국립발레단 단장의 인생 이야기는 인터뷰, TV, 잡지를 통해 누구나 알 만한 것이 됐다. 그녀의 구도자적 삶의 태도는 반클리프 아펠이 세계적 하이 주얼리 메종으로 자리 잡기까지 과정과 꽤 비슷해 보인다.

반클리프 아펠 스테판 라에 지사장과 국립발레단 강수진 단장.
반클리프 아펠(Van Cleef & Arpels)의 스테판 라에(Stephane Larher) 지사장을 만난 건 지난여름이다. 초이앤라거갤러리 최선희 대표와 함께 셋이 햇볕 좋은 날 즐긴 티타임에서 스테판 라에 지사장은 한국의 문화 예술이 얼마나 높은 가치를 지녔는지 새삼 느끼고 있다며 그중에서도 특히 아트와 공연에 관심을 보였다. 그가 그동안 프랑스에서, 그리고 지사장으로 발령받은 한국에서 시간이 허락할 때마다 연극 무대에 섰다는 사실이 매우 놀라웠지만, 그가 보인 문화 예술에 대한 애정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스테판 라에 지사장이 부임한 후 올 한 해 반클리프 아펠은 국립발레단을 협찬했다. 지난 11월 초, 4일간 무대에 올린 <안나 카레니나>는 무려 20억 원의 제작비가 투입된 대작이다. 국립발레단이 올해 가장 신경 쓴 작품이고, 2018 평창 동계 올림픽과 패럴림픽 대회의 성공적 개최를 기원하며 진행 중인 평창 문화 올림픽 프로그램 ‘평창, 문화를 더하다’의 일환이기도 하다. 스테판 라에 지사장은 “반클리프 아펠이 한국 최고의 발레단을 후원하고 서로 영감을 나눌 수 있어 의미 있는 한 해였다” 했고, 반클리프 아펠의 아낌없는 문화 예술 협찬은 내년에도 계속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1 강수진 단장은 발레와 하이 주얼리의 공통점으로 ‘우아함’을 꼽았다. 2 무용, 연극, 뮤지컬 등 문화 예술에 관심이 많은 스테판 라에 지사장.
이렇게 한자리에서 두 분을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스테판 라에 지사장님과 강수진 단장님은 2년 전 반클리프 아펠의 ‘Dance of Spring’ 행사에서 처음 만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때의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듣고 싶습니다.
강수진 l 반클리프 아펠 행사에서 스테판 라에 지사장님을 처음 만났는데, 정말 친절하게 저를 맞아주었어요. 제가 프랑스어를 약간 할 수 있다는 걸 안 후로 더 많은 이야기를 건넸고, 그날 우리는 정말 많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는 무용, 특히 발레의 역사에 대한 지식이 해박했어요. 만약 누군가 발레에 대한 궁금증이 생긴다면 저보다 지사장님께 물어보는 것이 나을 정도로 말이죠.(웃음) 이런 지식은 하이 주얼리와도 연결됩니다. 우리의 신체는 마치 조각 같아요. 그래서 발레든 주얼리든 그 ‘느낌(feeling)’을 잘 표현할 수 있도록 우리는 맵시 있게 행동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평소에도 단원들에게 “본인이 얼마나 신경 쓰느냐에 따라 신체의 맵시 또한 더욱 아름다워질 수 있다”고 말해요. 지사장님은 처음부터 그걸 이해했고, 그래서 더욱 말이 잘 통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는 발레를 음악과 연극, 디자인이 함께 담긴 종합예술이라고 했어요. 그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든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는 한번 만나면 좀처럼 이야기를 끝내지 못해요.(웃음)
스테판 라에 l 저희는 당시 <아트 오브 클립>의 한국 전시를 구상하고 있었어요. 파리 워크숍에서 83개의 클립을 가져와 쇼케이스를 하는 행사로 말이죠. 우리가 한국에 공수할 오브제는 매우 독창적인 피스였고, 대부분 역사적으로 발레와 깊은 연관이 있었죠. 그래서 강수진 단장을 만난 타이밍이 매우 절묘했어요. 더구나 그녀는 프랑스어를 완벽히 구사했죠.
지사장님은 그 전에도 국립발레단 공연을 자주 보셨나요? 이번 <안나 카레니나> 외에도 기억에 남은 공연이 있나요?
스테판 라에 l 물론이에요. 저희 집이 예술의전당 근처인 데다 제 어린 딸이 발레를 배우고 있어요. 발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구조죠.(웃음)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서로에 대한 사랑을 맹세한 무희 니키아와 전사 솔로르의 이야기를 다룬 <라 바야데르>예요. 한국에 부임한 후 처음 본 공연이죠. <로미오와 줄리엣>도 좋았어요. 무용수들의 움직임이나 음악의 대비 등 작품의 퀄리티가 무척 높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다가오는데, 가족과 함께 볼 만한 공연으로 점찍어둔 공연이 있나요?
강수진 l <호두까기 인형>!(웃음)
스테판 라에 l 맞아요, <호두까기 인형>. 그 공연을 지금까지 파리에서 한 번, 한국에서 한 번 봤는데, 크리스마스와 <호두까기 인형>은 정말 완벽한 매칭이에요. 크리스마스 시즌의 하이라이트 발레 공연이라고 할 수 있죠.
지난 11월 예술의전당 무대에 올린 <안나 카레니나>는 제작비 20억 원을 들인, 올해 국립발레단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작품입니다. 내년 2월 10일과 11일에 강릉 올림픽아트센터 무대에도 올리죠. 평창 동계 올림픽 개최를 기념하는 공연 중 하나여서 준비를 많이 하셨을 것 같은데, 특별히 이 작품을 선정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강수진 l <안나 카레니나>를 레퍼토리로 고른 이유는 오늘날 21세기 발레계에 국립발레단이 뭔가를 제시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국립발레단은 <백조의 호수>, <라 바야데르> 등 다양한 레퍼토리를 소화해왔지만 저는 우리 무대가 전 세계에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세계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는지 알고 싶었어요. 그래서 직접 이 공연을 골랐습니다.
레퍼토리 선정을 두고 주변에서 다양한 의견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강수진 l <안나 카레니나>와 함께 <허난설헌>을 공연할 계획입니다. 동·서양 공연을 매치한 것은 ‘전통문화가 아닌 것도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입니다. 월드클래스 반열에 오른 발레 레퍼토리의 특징과 형식을 알아야 ‘퀄리티’를 이야기할 수 있어요. 단원들도 하나의 레퍼토리만 해서는 안 돼요. 21세기에 그런 방식은 불가능합니다. 클래식, 모던, 네오클래식 등 모든 걸 유연하게 할 줄 알아야 해요. 과정은 정말 어렵지만 그걸 이루고 나면 세계가 얼마나 넓은지 깨달을 수 있을 거예요.

3 레이디 아펠 발레리나 앙샹테 워치 제작 과정. 반클리프 아펠은 주얼리와 워치 분야에서 독보적인 행보를 이어왔다. 4 제작에만 700시간이 걸린다는 발레리나 클립 ‘빠 드 트루아’. 5 발레리나 클립 ‘옐로 골드 루비 터쿼이즈’. 6 발레리나 클립 리테일 카드.
단장님은 10대 시절부터 모나코 왕립발레학교에서 수학하며, 모나코와 프랑스를 오갔습니다. 혹시 그때부터 반클리프 아펠을 알고 계셨나요?
강수진 l 반클리프 아펠은 굉장히 유명하죠. 저도 알고는 있었지만 학생이었기 때문에 늘 매장 밖에서 구경만 했어요. 특히 모나코에 5년 정도 있을 때 몬테카를로에 있는 반클리프펠 아부티크를 자주 지나쳤는데, 들어가본 기억은 없어요. 사실 그곳에 굉장히 유명한 해변이 있는데, 5년 동안 살면서 거기 가본 것도 딱 두 번뿐일 정도였으니까요. 공부하고 연습한 기억밖에 없습니다. 반클리프 아펠을 제대로 알게 된 건 스테판 라에 지사장님을 만나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하면서부터예요. 그 전까지는 부티크 윈도 너머로 구경하던 하이 주얼리 메종이었죠.
평소에도 반클리프 아펠의 주얼리를 즐겨 착용하세요?
강수진 l 목걸이를 자주 착용해요. 어제도 하고 다녔죠.
반클리프 아펠과 함께 좋아하는 주얼리 브랜드가 있나요?
강수진 l 딱히 특정 브랜드를 고집하진 않아요. ‘아름답다’고 생각하면 그냥 아름다운 거예요. 각각 그만의 색깔과 취향이 있으니까요. 그런 점은 공연과 비슷해요. 공연도 장르 불문하고 내가 좋으면 좋은 거예요. 대신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그 뒤에 숨은 역사, 전통, 노력입니다. 정말 좋은 공연, 좋은 주얼리라면 그런 요소를 꾸준히 유지해야하죠. 발레도, 주얼리도 아름다운 건 그냥 나오지 않습니다. 노력하지 않으면 아름다울 수 없어요. 반클리프 아펠의 이 발레 클립 시리즈를 보세요. 클립 하나를 만드는 데 무려 700시간이 걸린다고 하더라고요. 이런 주얼리를 몸에 착용한다면 아름다워질 수밖에 없겠죠.
스테판 라에 지사장님이 부임한 후 반클리프 아펠은 국립발레단을 본격적으로 협찬하기 시작했습니다. 반클리프 아펠의 공연 지원은 어떤 역사를 이어왔나요?
스테판 라에 l 반클리프 아펠은 1895년 다이아몬드 상인의 아들 알프레드 반 클리프와 보석 상인의 딸 에스텔 아펠의 결혼을 통해 1906년 파리 방돔 광장에서 탄생했습니다. 메종의 첫 번째 발레리나 클립은 발레와 오페라 애호가인 루이 아펠(Louis Arpels, 에스텔 아펠의 남동생)이 1940년 발레에서 영감을 받아 디자인한 주얼리가 그 시작입니다. 그 후로 메종은 새로운 오페라와 발레 공연을 후원하거나 젊은 예술가와 협업하는 등 다양한 방향으로 발레와 메종의 연결 고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1940년대 이후 발레는 반클리프 아펠 주얼리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 배경에 뉴욕시티 발레단의 설립자 조지 발란쉰(George Balanchine)이 있다고 들었는데, 좀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스테판 라에 l 긴 러브 스토리예요.(웃음) 루이 아펠의 조카 클로드 아펠은 1939년에 뉴욕에서 매장을 운영하고 있었어요. 하루는 우연히 부티크 창밖을 봤는데, 유명 안무가인 조지 발란쉰과 눈이 마주친 거예요. 그가 반클리프 아펠의 주얼리를 구경하고 있었던 거죠. 클로드 아펠이 밖으로 나가 인사하자 그는 “반클리프 아펠의 주얼리는 내 작품에 영감을 준다”고 말했고, 클로드 아펠도 조지 발란쉰이 자신에게 영감을 준다고 했죠. 그것이 반클리프 아펠과 무용이 본격적으로 만나게 된 시발점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우정은 1967년에 3부작의 발레 작품을 에메랄드, 루비, 다이아몬드로 표현해내며 조지 발란쉰의 발레 ‘Jewels’를 탄생시켰습니다.
<아트나우> 독자에게 발레 클립 시리즈 중 하나를 추천해주신다면?
스테판 라에 l 여자 무용수 둘과 한 명의 남자 무용수로 장식한 ‘빠 드 트루아’ 클립을 추천하고 싶어요. 각각의 무용수 클립을 따로 착용하거나, 2개만 같이 착용할 수도 있죠. 무엇보다 이 클립에 세공한 발레리나와 발레리노의 움직임이 아주 가벼워 보여서 좋아요. 제가 파리 워크숍에 갔을 때 장인들이 심혈을 기울여 이 클립을 만들고 있는 걸 봤어요. 그것이야말로 열정의 메타포였죠.
강수진 l 맞아요. 반클리프 아펠의 하이 주얼리는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져요. 1mm의 디테일 때문인 것 같아요.
지사장님은 평소 연극과 발레, 뮤지컬 등 공연 예술에 관심이 많습니다. 연극 무대에 직접 서기도 하신다고요. 그런 활동을 통해 무엇을 배우시는지 궁금합니다.
스테판 라에 l 작은 극장에서 단역을 맡아 연기한 적이 있습니다.(웃음) 아주 미미한 역할이었지만, 무대에 연극 한 편을 올리기까지 얼마나 많은 스태프의 노력이 필요한지 알게 되었죠. 주얼리도 그래요. 한 피스의 주얼리를 완성하려면 많은 사람의 고된 노력이 필요하거든요.
강수진 단장님은 국립발레단 단장직을 2020년까지 연임하게되셨습니다. 임기 동안 단장으로서 꼭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강수진 l 제가 국립발레단에 온 지 벌써 4년이 됐어요. 사실 제가 기대한 것보다 단원들은 훨씬 잘해주었고, 그들의 팀워크 또한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최고 수준입니다. 저는 ‘국립’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조직은 그야말로 국가를 대표한다고 생각해요. 외국에서는 우리 발레단을 보고 한국의 발레 수준을 평가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해요. “우리는 더 많은 레퍼토리를 연습해야 하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요. 하나라도 더 하겠다는 자세, 그게 우리 모두를 한 단계 성장시킬 겁니다.
마지막으로, 발레와 하이 주얼리의 공통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강수진 l 우아함 그리고 무대 뒤의 수많은 수고, 이것이 ‘아름다움’을 만들어냅니다. ‘No work, no beauty’라고 생각해요.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해 일해야 하죠. 하이 주얼리든, 발레든 독창적인 아름다움의 경지에 오르려면 남의 것을 베끼는 데 그치지 말고 무언가를 배우려 해야 합니다. 특히 예술은, 무언가를 배울 때 만들어져요. 하지만 누군가가 되려고, 무언가가 되려고 해선 안 되죠. 나는 단지 나여야 해요. 주얼리도 같습니다. 아, 말이 또 길어졌네요. 정리하자면 그 둘의 공통점은 ‘elegant, beauty and work’입니다.
스테판 라에 l 국립발레단의 <안나 카레니나>를 봤을 때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무대 뒤에 숨은 과정(work) 때문입니다. 무용수를 보고 있으면 그 가벼운 몸짓과 아름다운 움직임이 매우 쉬워 보여요. 그런데 그것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그 이면에 숨은 수많은 연습과 노고가 눈에 보이기 시작합니다. 연극도 그래요. 배우들은 대본을 수없이 읽은 다음 무대에 올라요. 어떻게 숨을 들이쉬고 얼마나 연습하느냐에 따라 감정 표현이 달라집니다. 훈련이 필요하죠. 발레나 하이 주얼리 모두 그 뒤에 숨어 잘 보이지 않지만 정말 중요하게 작동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진실된 고귀함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합니다.
에디터 김이신(christmas@noblesse.com)
사진 J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