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으로 복귀를 허하라
온라인상에 남은 부끄러운 과거가 당신의 현재를 곤란하게 한다면? 일상으로 복귀하게 하는 작은 다리, ‘잊힐 권리’가 필요한 때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고 했다. 독립된 인격체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다른 사람과 교류하며 지낼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누군가에게 기억되길 바란다. 물론 좋은 기억에 한해서다. 누구에게나 잊고 싶은 과거도 있는 법이니 말이다.
스페인의 변호사 마리오 코스테하 곤살레스(Mario Costeja Gonzalez)도 그랬다. 2009년 어느 날, 그는 구글 검색창에 자기 이름을 넣어보고 깜짝 놀랐다. 10여 년 전 빚을 갚지 못해 집이 경매로 넘어갔다는 기사가 버젓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를 지우고 싶었지만, 구글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곤살레스는 소송을 제기했고, 2014년 5월 유럽사법재판소는 구글이 해당 검색 결과를 보여줘서는 안된다고 판결했다. 언론의 보도 목적은 이미 달성했고, 10여 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한 인간의 프라이버시가 침해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다른 사례도 살펴보자. 어느 억울한 범죄자의 이야기다. 그는 파렴치범으로 몰려 법원 1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 뉴스로서 가치가 있어 각종 언론에서 이 사건을 다뤘고, 블로그와 SNS 등에서도 기사를 퍼 날랐다. 하지만 그는 법정투쟁을 거듭해 무죄 확정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이 사실은 보도되지 않았고, 파렴치범이라는 기사는 여전히 온라인에서 계속 검색됐다. 외국의 한 여교사 이야기도 있다. 그녀는 젊은 시절 생계를 위해 스트리퍼로 일했지만 뒤늦게 열심히 공부해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로 취업했다. 그런데 인터넷 사이트에 과거 사진이 유포됐고, 이 사실을 알게 된 학부모의 항의로 학교에서 해고됐다. 또 어떤 정치인은 음주 운전, 탈세 등 범법 사실 또는 숨기고 싶은 옛 정치적 견해를 보여주는 기사를 인터넷에서 지우고 싶어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시민단체, 경쟁 관계에 있는 정치인의 비판으로 그는 선거에서 떨어졌다.
당신은 누구의 편을 들 것인가? ‘잊힐 권리(right to be forgotten)’에 관한 고민은 여기서 등장한다. 잊힐 권리란 직접 또는 제3자가 온라인에 올린 정보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를 말한다. 헌법상 인간의 존엄과 행복추구권, 개인 정보 자기 결정권에 의해 보호받으며 프라이버시권이나 명예권의 일종으로도 볼 수 있다. 최근 온라인 정보의 전파성, 공공성, 지속성으로 인해 부정확하거나 지우고 싶은 정보가 퍼지며 많은 피해자를 낳고 있다. 특히 제3자가 올린 정보는 나에 관한 것이라도 명예훼손, 저작권 침해 등 법에 위반되지 않는 한 내가 지울 권한이 없는 상황이다.
유럽의회는 GDPR(General Data Protection Regulation)을 제정, 2018년 5월부터 시행할 예정이다. GDPR 제17조는 EU 시민이 민간과 공공 영역의 개인 정보 처리자 모두에게 자신의 정보가 담긴 데이터 처리를 중단하고 삭제할 것을 요구할 수 있게 한다. 개인 정보 처리자는 제3자에게 이미 개인 정보를 제공한 경우라도 삭제 등 필요한 조치를 해야 하고, EU 시민이 자신의 개인 정보 삭제권을 쉽게 행사할 수 있도록 메커니즘과 양식을 제공해야 한다. 이는 EU 국가에서 사업하거나 EU 시민의 데이터를 처리하는 기업에 모두 적용된다.
한국의 상황은 어떨까? 정보통신망 이용 촉진 및 정보 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44조 제2항(정보의 삭제 요청 등)에 따르면, 정보통신망을 통해 일반 공개를 목적으로 제공된 정보가 타인의 사생활이나 권리를 침해한 경우, 침해받은 자가 정보통신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업자에게 삭제 또는 반박 내용 게재를 요청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위법한 정보에 대해 행사할 수 있는 권리로, 적법하게 게시된 정보를 대상으로 하는 잊힐 권리로 보기는 어렵다. ‘적법하게 게시된 정보에 대한 처리 여부’, 이것을 두고 잊힐 권리의 도입에 관한 논의가 시작된다. 찬성론은 개인 정보 자기 결정권, 행복추구권, 명예를 보호해야 한다고 말한다. 특히 한국은 외국보다 무분별한 온라인 활동이 많은 편인데, 그 폐해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잊힐 권리가 필요하다고 보는 것.
반대론도 만만치 않다. 정치인 등 공인이 과거를 세탁하는 통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국민의 알 권리를 침해하고, 언론 등 표현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것이 핵심. 잊힐 권리로 인해 책임의식 없이 게시하는 정보가 늘고, 문화적 오염을 가져올 거란 우려도 있다. 절충론도 존재한다. 글이나 사진 등 표현물이 게재된 이후 상당한 기간이 지나고, 그 과정에서 표현의 자유가 목적을 달성했다면 잊힐 권리를 허용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미성년과 장애인 등 사회 취약 계층을 위한 보호 수단으로 도입하자는 견해도 있다.
다양한 의견이 난립하는 상황에서 방송통신위원회는 지난 2016년 ‘자기 게시물 접근 배제 요청’ 관련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개인이 직접 인터넷에 게시한 글, 사진, 동영상 등을 삭제하려 시도했으나 안 되는 경우(게시물을 올린 사이트의 아이디나 비밀번호를 잊어버렸거나, 예전 사이트 운영자가 없어졌을 때 등), 게시판 관리자에게 블라인드 처리 등 접근 배제를 요청하거나 검색 사업자에게 검색 목록 배제를 요청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다만 이 가이드라인은 제3자가 올린 게시물에 관해서는 접근 배제를 요청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또한 어디까지나 ‘권고’ 조치에 불과해 법적 근거가 부족하다는 비판도 있다.
현재 유럽연합 등 잊힐 권리를 입법하는 국가가 등장했을 뿐 아니라, 그렇지 않은 국가에서도 도입 논의가 확산되고 있다. 국내 법원과 학계에서도 외국 판례에 대한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지는 중이다. 머지않아 한국에서도 잊힐 권리는 우리가 행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권리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그 내용은 어떻게 구성될지 짐작이 가는가?
첫째로 잊힐 권리의 대상이 되는 게시물은 나와 제3자가 올린 것 모두를 포함할 것이다. 다만 제3자가 올린 글은 표현의 자유 등으로 보호받으므로, 잊힐 권리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엄격한 요건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예컨대 언론사의 공신력 있는 기사는 언론의 자유와 국민의 알 권리를 고려해 잊힐 권리의 대상에서 제외될 것이다. 둘째로 잊힐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선 일정한 조건을 충족해야 할 것이다. 우선 게시물이 게재될 당시 적법한 것이어야 한다. 또한 오랜 시간이 흘러 정보의 가치 또는 게시물을 올린 사람이나 게시물에 등장하는 사람의 이익을 보호할 필요성이 줄어들고, 그런데도 게시물을 삭제하고 싶은 사람에게 극심한 정신적·재산적 고통을 주고 있어 잊힐 권리를 행사하는 것 외에 별다른 구제책이 없을 경우 대상에 포함될 것이다.
또 잊힐 권리의 구현 방식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다. 자신이 올린 게시물은 언제라도 수정과 삭제가 가능할 테지만, 앞서 언급했듯 제 3자가 올린 게시물의 삭제를 요구하는 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우려가 있다. 이럴 땐 검색 사이트에서 검색이 안 되도록 하는 게 합리적이다. 그런데 여기선 검색되지 않게 하는 것을 사업자가 할지, 혹은 게시물을 지우고 싶은 사람에게 직접 삭제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를 제공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이런 경우 개인이 직접 할 수 없다면 사업자의 지원을 받는 게 좋다. 또 사업자에게 개인이 잊힐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시스템을 갖추도록 요구할 수 있을지도 문제다. 이는 소요 비용이나 경영 부담 등을 고려해 합리적으로 결정해야 한다.
인터넷과 모바일로 연결되는 온라인 공간은 오프라인에 버금가는 또 하나의 세상이다. 그런 만큼 온라인상에서 언행을 현실에서처럼 주의하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하지만 과거에 무심코 올린 게시물이 당신의 현재를 고통스럽게 하거나 누군가 올린 게시물이 당신에게 말 못할 피해를 준다면, 거기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하는 작은 다리 하나는 필요하지 않을까? 잊힐 권리가 그 역할을 할 것이다.
글쓴이 소개
이상직은 정보통신부(현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서 ICT 정책과 규제 업무를 담당했고, KT 법무센터 전무로 근무하며 지식재산권, 공정거래, 개인 정보 등의 업무를 총괄했다. 현재 법무법인 태평양의 파트너 변호사로 Technology, Media & Telecommunication팀을 이끌고 있다.
에디터 황제웅(hjw1070@noblesse.com)
글 이상직(법무법인 태평양 파트너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