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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없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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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없는 세상에 울려 퍼지는 영웅가.

지난 주말은 영웅에 취해 있었다. 마감 핑계로 미뤄둔 히어로 무비를 몰아 봤다. DC의 <저스티스 리그>와 마블의 <토르: 라그나로크>, 넷플릭스 오리지널 <데어데블>, 한국 액션 영화 <범죄도시>(이건 일종의 마동석 히어로물이다)까지. 스크린과 IPTV를 오가며 영웅의 위대함을 현기증 나도록 관람했다. 현대의 영웅은 화면 속에 산다. 그들은 형사이거나 고대 전사, 바다의 수호자, 사이보그, 외계인, 재벌까지 다양한 배경과 특수 능력을 지녔다. 하늘을 나는 건 예사고 총알을 퉁겨내거나 망치를 타고 우주를 비행한다. 물리법칙을 가볍게 무시한다. 그런 비범함에 대중은 환호한다. 그들의 능력에만 열광하는 것은 아니다. 영웅들은 정치적으로 올바르다. 정의를 수호하고 악과 싸운다. 좁게는 서울 가리봉동부터 뉴욕 같은 메트로폴리탄, 나아가 지구와 우주를 수호하는 절대 선(善)이다. 정의가 비현실적 힘으로 악의 무리를 내동댕이칠 때 대중은 카타르시스를 느낀다(<어벤져스> 1편에서 헐크가 로키를 패대기치는 장면을 떠올려보라). 가장 영화적인 장르가 히어로 무비라는 건 화려한 CG 효과나 우주를 배경으로 해서가 아니다. 신 없는 시대에 신을 그리기 때문이다. 21세기 영웅은 힘겨운 삶을 산다. 과거 영웅을 홀로 고군분투하는 슈퍼맨이 대변한다면 현대의 영웅은 떼로 몰려다닌다. <저스티스 리그>는 아예 ‘혼자서는 세상을 구할 수 없다’는 헤드 카피를 전면에 내세우고 영웅들을 불러모은다. 그러나 악의 무리는 더욱 강력해지고 세상은 종말을 향해 전진 중이다. 수십명이 모여도(<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 등장하는 히어로는 30명에 육박할 예정이다) 빌런에게 쩔쩔매기 일쑤다. 신의 영역이던 영웅의 서사가 사람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다. 영화는 현실을 반영한다. 가상의 것으로 현재를 이야기한다. 히어로물이 범람하지만 그 속에서 영웅은 점차 희미해지고 있다. 현재 영웅은 모두 사라진 것이다.

영웅의 몰락
영웅이 존재하던 때가 있었다. 눈에서 레이저가 나가거나 시공간을 넘나드는 초인은 아니지만 시대의 신화로 존재했다. 그들은 열세인 전쟁을 승리로 이끈 수장이거나 국가의 독립을 이끈 지도자, 세계대전을 막고 평화를 지킨 수호자다. 또는 신약 개발로 수천만의 생명을 구한 과학자나 인종차별의 부당함을 설파해 인류 발전에 이바지한 이들이다. 단 1%의 영웅이 인류를 이끌어가던 때가 있었다. 영웅의 시대는 금세 저물었다. 20세기를 전후로 성숙한 시민의식, 전 세계를 잠식한 자본주의와 산업화의 영향은 영웅들을 뒷길로 내몰았다. 영화 <왓치맨>에서 영웅들은 세계대전에서 주요 국가의 칼이나 총탄으로 쓰이고 냉전 시대 종식 후 은퇴를 강요받는다. 평화의 시대에 영웅은 또 다른 혼란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불과 20년 전만 해도 영웅은 사회적 메시지로 기능했다. 위인의 일대기는 범인들에게 어떤 길잡이가 됐다. 그들처럼 용감하고 지혜로우며 정의의 편에 서야 한다고 설파했다. 존경하는 위인을 묻는 것이 설문의 필수 요소이거나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위인전을 읽어야 한다고 떠들던 때다. 영웅은 사회를 유지하는 도구로서 유익하다. 국가도 그 점을 잘 알고 있다.
미국은 대표적 영웅주의 국가다. 18세기부터 시작된 짧은 역사에서 비롯한 콤플렉스와 군국주의의 정당화를 위해 무수한 영웅을 창조했다. 최초의 미국인이라 일컫는 벤저민 프랭클린부터 미국 자유주의의 상징인 에이브러햄 링컨, 제2차 세계대전의 전쟁 영웅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등은 미국 역사에서 신격화 된 인물이다. 이들의 얼굴을 미국 화폐에 프린트하기도 하고 이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미주 전역에 기념비를 세운다. 영웅의 서사는 상상력으로 채워진다. 어떤 목적을 갖고 부풀리거나 과대포장하기도 한다. 미국의 역사학자 하워드 진이 펴낸 <권력을 이긴 사람들>은 미국의 보편화된 영웅 숭배에 직격탄을 날린다. 링컨의 노예제 폐지는 정치적 생명 연장을 위해 마지못해 택한 흉측한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그보단 불합리한 제도에 맞서 전쟁에 참여한 시민이 더 가치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미국의 군국주의에 대해서도 날을 세운다. 일례로 이라크 전쟁을 꼬집는다. 하워드는 미국이 독립전쟁 이후 대외 관계에서 줄기차게 오만함을 과시해왔고 그 참혹한 결과가 이라크전이라는 명분 없는 전쟁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미국은 거대한 군사 국가다. 군인은 쉽게 영웅화된다. 미국 시민은 가장 신뢰하는 국가기관으로 군대를 꼽는다. 1973년부터 줄곧 설문조사 1위를 지켜왔다. 나라를 위한 희생을 숭고하게 여기는 국가주의적 이데올로기가 만든 결과다. 매년 5월 마지막 첫째 주를 현충일(메모리얼 데이)로 지정하고 11월 11일은 참전 용사의 날로 기리고 있다. 연중 가장 중요한 국경일 중 하나다. 이날이 되면 미국 전역은 성조기로 도배된다. 신문과 매거진, TV도 온종일 세계대전에 참여한 영웅들의 이야기로 채운다. 한국도 정권이 바뀌는 시점이나 IMF, 세계 금융 위기 등의 상황에서 영웅을 이용했다. 이순신이나 세종대왕, 신사임당, 안중근 같은 위인이 재조명받은 것은 불과 10~20년 전 일이다. 물론 역사적으로 중요한 업적을 남겨 재조명된 경우도 있지만 분위기 전환이나 국가적 돌파구가 필요할 때 이용한 측면도 있다는 것이다. 영웅신화에 대한 설파는 일종의 각성 효과와 마취제 역할을 한다. 그들의 위대함 앞에서 우린 모두 비루하니까, 노력과 성과는 항상 그들에 비해 미천하니 더 열심히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들의 후예라는 자부심에 취해 근심이나 걱정을 잊는 것이다. 물론 이건 과거의 일이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989년을 기점으로 영웅주의는 점차 퇴색해갔다. 여전히 신의 이름으로 테러(그들은 성전이라 표현한다)를 자행하는 IS나 아직 부족주의가 존재하는 아프리카 부족이 있지만 선진화가 어느 정도 진척된 국가에서 영웅은 이미 생명이 다했다.

개인보단 시스템
근대의 영웅이 전쟁터에서 탄생했다면 현대에는 자본의 틈바구니에서 나온다. 산업화가 전 세계를 휩쓴 1900년대엔 무수한 ‘성공 신화’가 쓰였다. 거대 담론이 돈으로 대체되면서 현대의 영웅은 망토 대신 많은 돈을 두르고 있다. 미국 정유소의 95%를 지배한 석유 재벌 록펠러와 자동차왕 포드, 제약 회사의 신으로 불린 코프먼 등은 현재 대중의 영웅이자 롤모델이다. 성공한 기업가 신화는 자본주의 세계에서 유용하게 쓰였다. ‘성공을 갈망한다면, 많은 돈을 벌고 싶다면 이들처럼 열심히 일하고 독창적인 생각에 골몰하라.’ 이 캐치프레이즈의 효과는 생각보다 좋았다. 성공 신화를 이룬 총수의 지휘 아래 모든 직원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기업. 이는 가장 완벽한 형태의 조직처럼 보였다. 한동안 그들의 이름이나 말이 기업의 상호보다 앞섰다. ΟΟΟ 선언이나 ΟΟΟ 구상 등 그들이 전개하는 전략과 구상에 투자자들은 돈을 싸 들고 몰려들었다. 그러나 자본 영웅의 시대도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이미 기업은 하나의 유기체처럼 촘촘한 짜임새를 갖췄다. 한 명의 발언이나 행보가 (아무리 CEO라 해도) 기업의 흥망성쇠를 결정하는 시대는 종말을 맞이한 것이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 이후 전 세계 기업은 한 명의 스타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이전 같은 효과를 거두기도 어렵거니와 한 명에게 기업의 운명을 짊어지게 하는 리스크 때문이다. 이건 국내 기업도 마찬가지다. 최근 삼성전자는 성과주의와 세대교체를 원칙으로 임원 인사에서 DS(부품), CE(가전), IM(IT 모바일) 등 3대 사업 부문 장을 60대에서 50대로 교체했다. 사장으로 승진한 7명 모두 50대인 파격적인 인사를 감행한 것이다. LG전자도 연말에 시행한 임원 인사에서 사장으로 승진한 3명 모두 50대였다. 이 밖에 GS그룹, LS그룹도 50대를 전면에 내세우는 인사를 단행했다. 세대교체라는 명분이 존재하지만 한 명에게 과도한 권한을 주는 것과 기업과 개인이 동일시되는 이미지를 경계해서다. 이는 기업뿐 아니라 사회 각 분야에서 일관되게 불고 있는 바람이다. 오너보단 기업(단체), 개인보단 시스템에 의해 작동하는 사회, 21세기의 코드는 거기에 있다. 영웅의 시대가 저문다. 슬픈 일은 아니다.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연극 <갈릴레이의 생애>에 등장하는 말처럼 “영웅 없는 사회가 불행한 것이 아니라, 영웅을 필요로 하는 사회가 불행한 것”이기 때문에. 지금의 사회는 영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에디터 조재국(jeju@noblesse.com)
사진 최민석